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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토홍 26세 - 홍사익(洪思翊)

by 문희공 2022. 12. 18.

홍사익(洪思翊) - 참의공파(參議公派) 26세 사(思) 수(秀) 항렬

 

개요

홍사익(洪思翊, 1887년 2월 2일~1946년 9월 26일)은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군인이며,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 육군 중장을 지냈다.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 출신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 필리핀 마닐라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내용

홍사익은 경기도 안성에서 자작농 홍이유(洪理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사익의 선조는 조선 숙종 때의 남인 붕당의 지도자였던 남파 홍우원이었다. 중추원 참의를 지낸 정교원과 사돈 관계이다. 그러나 홍사익의 집안은 몰락하여 아버지 홍이유 대에는 농민으로 전락하였다. 명성황후 여동생의 아들인 이종조카 정갑진이 홍사익의 사촌 처남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20년 정도 차이 나는 맏형 홍사용(洪思容)에 의해 양육되었다.

 

홍사익은 대한제국 무관 학교를 거쳐 1912년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일본육사 26기]. 12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도쿄 제1사단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홍사익의 졸업 성적이 우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배웠고 사서오경을 암송할 정도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는 이야기는 홍사익이 특별히 우수하였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일본인 장교들의 회고록에도 자주 등장하고는 하였다. 홍사익은 우수한 성적을 배경으로 초급장교 생활에 충실히 임하였고, 소속 연대장의 추천을 받아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생 중에서도 10% 미만이 진학할 수 있는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일본육대 35기]. 이로써 육군 장성으로까지 출세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선인 출신 장교 중에는 영친왕 이은 등 황족이 아닌 신분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장교의 길을 걸었고, 결국 일본군 육군 중장까지 진급하는 조선인 장교가 되었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김광서, 지청천, 이종혁 등이 일본군 장교의 신분을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했을 때 홍사익은 육군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육군성 인사과에 배속되어 입시 공부에 열중하였고, 결국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일본군 고위 장교로 일생을 보냈던 것이다.

 

홍사익의 대표적인 친일 활동으로 확인된 사실을 보면 다음과 같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홍사익의 활동이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호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제2조 제19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 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첫째, 홍사익은 1914년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정규 과정 육군사관학교 출신 중 비황족으로는 유일하게 육군 중장이라는 고위 군인으로 출세하면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였다. 또한 홍사익은 1934년부터 2년간 만주에서 관동군참모부 소속으로 재만 조선인 업무를 담당하면서 재만 조선인을 일본 국민의 일부로서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지인 만주국에 적극 협력시키는 사무를 담당하였고, 그 결과물이 1936년 8월 제정된 「재만조선인 지도요강」이다. 1939년부터 약 2년간 일본의 중국 점령지 행정 당국의 하나인 흥아원 화중연락부 경제2국장으로서 상하이에 주재하면서 일제의 중국 점령 통치에 협력하였다. 이후에는 일본군 보병여단장으로 중국 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수행하였고 육군 공주령 교도학교(敎導學校) 간사[부교장]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둘째, 홍사익은 30여 년에 걸쳐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군인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1934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瑞宝章)을 받았다. 그리고 만주에서 만주국군 고문 등으로 근무한 공로를 인정받아 만주국 정부로부터 1937년 훈3위의 서위와 경운장(景雲章)을 받았다.

홍사익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일본군 장성으로서 필리핀포로수용소 소장을 역임하였고, 필리핀 전선의 남방총군이었던 제14방면군 병참감으로 근무하면서 연합군 포로에 대한 대우를 정당하게 하지 않고 포로를 학대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혐의로 패전 직후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포로 학대라는 B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마닐라 군사법정에서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태평양 전쟁의 B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1946년 9월 현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국내에서 일부 인사들이 맥아더 사령부에 진정서를 내는 등 구명 운동을 폈고, 일본에서도 패전 직전에 작전권이 없는 보급지휘관으로서의 홍사익이 전범으로 처단된 데에 부정적인 여론도 있었다. 홍사익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에 등재되었으며,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 위키백과 외

 

홍사익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