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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토홍 24세 - 홍난파(洪蘭坡) [본명:홍영후(洪英厚)]

by 문희공 2022. 12. 18.

홍영후(洪永厚) -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24세 후(厚) 항렬

 

개요

홍난파(洪蘭坡)1897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는 한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다. 본관은 남양 홍씨 토홍계이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10여곡의 가곡과 〈고향의 봄〉, 〈나뭇잎〉, 〈개구리〉, 〈무지개〉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생애

1897년 4월 10일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現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아버지 홍준(洪埻, 1858. 9. 11 ~ 1917. 2. 8)과 어머니 전주 이씨(1858. 8. 27 ~ 1908. 3. 22)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준은 1900년 5월 20일 통신사 전화과 주사(通信司電話課主事)에 임명되었다가 이튿날인 5월 21일 의원면직했다.

홍난파는 3세 때 상경해 한성부 서서 황화방 군기시계 대정동(現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6]에 거주하면서 새문안교회에 출석했고, 어릴 적부터 교회음악을 비롯한 서양음악에 입문할 수 있었다. 소년 시절에는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사립 영신소학교에 다녔다. 14살 되던 1910년 9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 중학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14년 3월 졸업했다. 그 사이 1912년부터는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성악과에 입학해 1913년 4월 2회로 졸업했고, 1913년 다시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 입학해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1914년 졸업 후 이듬해인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에 임용되었다.

이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1년간 수학했으나 이내 중퇴하고 1918년 4월 관립 도쿄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해 이듬해인 1919년 3월 수료했다. 1919년 2월부터 문학, 미술, 음악의 3가지 분야를 다루는 잡지 『삼광(三光)』을 창간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고, 1922년 9월에는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고 연악회의 기관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하는 등 문예활동에 주력했다.

1926년 3월 도쿄고등음악학원(現 쿠니타치음악대학) 선과(選科)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해 본과에 진학했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귀국 후 그해 9월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교유(敎諭)로 채용되었다가 1931년 9월 미국 시카고에 있던 셔우드 음악학교 연극과에 입학했고, 그해 12월 흥사단에 가입했다. 1932년 6월 셔우드 음악학교 졸업 후 귀국해 1933년 4월 경성보육학교 음악과 주임 교유로 부임했고,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러던 1937년,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72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전향 협박을 받았다. 결국 건강악화 끝에 그는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이듬해 6월 18일, 홍난파는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김여식(金麗植)·전영택(田榮澤)·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갈홍기·현제명 등 12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노진설·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5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공식적으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하였으며,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다.#

또한 '모리카와 준(森川潤)'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음악을 여럿 작곡했다.[7] 1941년 1월 11일 친일단체 조선음악협회의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에 선출되었고, 1월 29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941년 8월 30일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삼육서울병원)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2009년 11월 홍난파의 행적에 대해 수록했으나, 대통령 직속 산하기관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홍난파가 자의적으로 했는지 타의적으로 했는지 좀 더 따져야 한다.'면서 보류처리를 했다. 하지만 2010년 11월 홍난파의 후손이 '홍난파를 친일인사 명단에서 제외해달라'며 낸 소송을 돌연 취하함에 따라, 결국 등재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 왈가왈부가 있다. 보수적인 양악계에서는 "친일을 하지 않았으면 작품 활동은 물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며 옹호론을 펼치기도 한다.[8] 물론 이에 대해선 생활고와 각종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굽히지 않은 예술가들을 반례로 들며 반박하는 의견 또한 강하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과는 별개로 홍난파의 친일 행적에 대해선 이미 1993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파 99인>과 같은 여러 친일파 고발 책자에서 음악가 대표로 크게 소개되었기에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출처 : 나무위키 / 위키백과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