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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토홍 22세 - 홍대용(洪大容)

by 문희공 2022. 12. 18.

홍대용(洪大容) - 정효공파(貞孝公派) 22세 대(大) 항렬

 

개요

홍대용(洪大容, 1731년 5월 12일 ~ 1783년 11월 17일[1])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이다.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박제가 등과 우정을 쌓았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과 경제장려에 치중하였다.

은신군, 추사 김정희와도 인척간이 되는데, 그의 사촌 남동생인 홍담용의 딸이 은신군부인 남양 홍씨였으며, 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홍씨 부인이 홍대용의 사촌 여동생이다.

 

생애

1731년 5월 12일 충청도 청주목 수심면 장명리(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장명마을)에서 목사(牧使)를 지낸 아버지 홍력(洪櫟, 1708. 10. 11 ~ 1767. 11. 12)과 어머니 청풍 김씨(1708. 1. 13 ~ 1786. 9. 18)[5]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론 사림의 으뜸으로 꼽히던 석실서원의 미호 김원행을 스승으로 학문을 연마했으며 무한 우주론과 지전설을 주장했고[6] 대중에서 설파한 과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이기도 하며 당대 연경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해 본 적이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음률에도 밝았다. 저서로는 《담헌서》, 《사서문의》, 《의산문답》, 《임하경륜》, 《건정필담》, 《주해수용》, 《을병연행록》[7]이 있다. 연암 박지원과의 교분이 깊었고 박지원과 온갖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는데 박지원이 홍대용 사후에 직접 지은 홍덕보묘지명에 그 찬탄이 잘 나타나 있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등 후세대 실학자의 고문이자 후견인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나경적과 함께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를 개량했다.

1772년 6월 18일 오후 7시경 담헌 홍대용의 저택인 유춘오(留春塢: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뜻)에는 홍대용의 친구들이 모여 들었다. 홍대용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사람들이 유럽의 바로크 고음악 악기인 덜시머와 하프시코드를 모방해 만든 악기인 양금(洋琴)을 국내에 소개했는데 이날 연주회는 홍대용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양금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연주법을 몰랐던 홍대용은 수 년간 노력한 끝에 조선의 고유한 방식으로 양금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악보도 없는 상태에서 홍대용은 스스로 독주법을 터득한 맑고 청량한 타악기의 소리를 최초로 조선에 전했다. 홍대용이 중심이 된 '유춘오 악회'란 이름의 정기 음악회에서 서양 악기를 통한 음악을 처음 들은 청중들은 감탄했고 자리에 있었던 연암 박지원은 그 때의 감동을 자신의 문집 <연암집>에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함께 기록해 놓았다. 조선의 음악인들은 이를 적극 수용해 국악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홍대용은 서양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악기인 양금뿐만 아니라 청나라 연경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해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즉석에서 연주해 천주교 신부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었다. 당시 서양은 바흐 이후 하이든이 활동하던 고전 시대. 어떻게 홍대용은 오르간을 직접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독학으로 혼천의를 만들기도 했던 홍대용으로서는 서양의 악기를 다루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절대 음감을 소유한 음악인이자 조선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로 정평이 난 홍대용이었기에 몇 번의 궁리 끝에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법을 터득했던 것이었다.

1775년 홍대용은 세자익위사의 시직으로 출사하여 젊은 세손을 보필하고 가르치는 자리를 1년간 맡게된다. '계방'으로 불리는 세자익위사(그래서 이 시절에 세손과의 문답을 기록한 홍대용의 <담헌서> 내부의 기록도 '계방일기'다)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는 서연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시직은 종8품으로 품계는 낮지만 믿을만한 공신이나 재상의 자제들이 임명되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세자의 말동무도 하고 선생도 하는 까닭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요직에 발탁되기도 했다. 홍대용은 이후 외직만 돌았고 정조가 보위에 오른 이후 몇 년 안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쉽게도 중히 쓸 일은 없었다. 세손은 서연 자리에서 홍대용에게 연경의 풍속을 묻기도 하고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등 1년간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의양이 홍대용을 고문으로 두라고 추천하자 정조는 홍대용의 막힘없는 대답을 보고 "몇 차례 보고 이미 그럴만한 사람인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관은 다른 편이었는데 격물치지와 실천을 중시하던 홍대용에 비해 "그게 중요한 것은 알지만 치국 평천하의 일을 버릴 수는 없다"라고 답한다거나 "강희제의 치세가 성군의 치세였다"라든지 연경의 번화함을 연경의 등으로 설명하는 홍대용에게 "조선 궁중에서 사용하던 등이 아름다웠다"며 응수하는 세손의 모습은 이후 두 사람의 행보가 갈린 이유를 설명해주는 일화일지도 모른다.

 

 

출처 : 나무위키 / 위키백과 외